
수많은 전쟁 영화들이 ‘전장’과 ‘영웅’을 중심으로 구성되지만, 게오르기우의 『25시』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는 이 모든 공식에서 벗어납니다. 총성도, 폭발도 없이 인간을 파괴하는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며 전쟁의 본질을 질문하죠. 이 영화는 전쟁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에게 '전혀 새로운 시선'을 제공합니다. 단순한 감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충격을 줍니다.
전쟁을 그리지 않고도 전쟁을 가장 잔인하게 보여주는 영화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종종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 영웅의 희생, 처절한 생존 드라마에 몰입합니다. 그러나 『25시』는 이런 장면 없이도 전쟁의 잔혹함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 요한 모레수는 농부입니다. 총을 들지도, 싸움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범죄자’, ‘유대인’, ‘공산주의자’ 등으로 몰립니다. 죄가 없는데도 끊임없이 바뀌는 체제와 권력 아래에서 신분이 왜곡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철저히 박탈당합니다. 영화는 포탄 한 발 없이도 무기보다 더 위험한 것이 ‘제도’라는 사실을 차갑게 보여줍니다. 감옥, 법정, 병원, 수용소는 인간을 보호해야 할 사회 시스템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사람을 분류하고 배제하는 도구로 작동합니다.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어야 안심하는 체제는, 사실 가장 잔인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억압의 시스템, 그 속에서 아무 힘도 없는 개인이 어떻게 희생양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25시』는, 기존 전쟁영화가 놓치고 있는 ‘침묵 속의 폭력’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런 구조적 비극이야말로, 현실 속에서 더 자주 벌어지는 전쟁의 실체일지도 모릅니다.
전쟁영화를 넘어선 역사적 리얼리즘과 인간의 비극
게오르기우가 쓴 원작 『25시』는 단지 소설이 아닙니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겪은 루마니아와 유럽의 정치적 혼란, 전체주의의 압박, 자유의 상실이 사실적이고 날카롭게 녹아 있습니다. 영화 역시 이 배경을 충실히 재현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인간의 고통을 이념 없이 조명합니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람들은 이미 체제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억압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작품의 핵심이죠. 요한의 정체성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에 의해 정의됩니다. 나치 아래서는 유대인으로 분류되고, 나중에는 소련 체제 아래 공산주의자의 의심을 받습니다. 국경이 바뀌고 체제가 변할수록 요한은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잃어가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점에서 『25시』는 단순히 반전 메시지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정체성과 자유 의지를 문제 삼습니다. 특히 이 영화는 현대 사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이념에 의한 개인의 소외, 정체성의 해체, 행정 권력의 폭력성 등을 성찰하게 만듭니다. 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이며, 그래서 『25시』는 단순히 고전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텍스트로 읽힙니다.
전쟁을 보는 새로운 관점, 침묵이 더 강렬한 서사
『25시』가 전쟁영화 마니아에게 더욱 특별한 이유는, 기존 전쟁영화의 공식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액션도 없고, 영웅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그것도 가장 깊은 곳에서 건드리는 작품입니다. 영화 내내 감정은 절제되고, 요한은 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침묵' 속에 담긴 메시지는 더 크고 무겁습니다. 이 영화는 시선과 침묵, 느린 이동, 무표정한 얼굴 등을 통해 폭력의 일상화와 그 안에서 사라지는 인간의 감정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연출은 단순한 전쟁영화 이상의 ‘인문학적 통찰’을 가능하게 하며, 관객이 받아들이는 충격의 방식도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참상보다, 보이지 않는 구조적 억압이 더 오래, 깊게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25시』는 인간이 어떻게 체제 속에서 객체화되고,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존재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단지 전쟁 중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반전의식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질문까지 품은 영화로 평가받습니다.
전쟁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꼭 봐야 할 이유
전쟁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25시』는 다른 모든 전쟁영화의 연장선이 아닌,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작품입니다. 전쟁이 단지 총과 대포, 전투 장면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와 제도, 이념이 만들어낸 더 근본적인 폭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25시』는 그동안 전쟁영화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질문을 던집니다. “전쟁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인간은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또 다른 25시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러한 질문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감상 그 이상의 성찰로 이끌고, 이후 다른 전쟁영화를 볼 때도 관점을 새롭게 바꿔줍니다. 폭력이란 무엇인지, 자유란 어떤 의미인지, 정체성이란 누가 결정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강력한 철학적 메시지가 바로 이 영화의 진짜 힘입니다.
『25시』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휘말린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체제와 제도가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전쟁영화를 많이 봤더라도, 이 작품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깊은 충격과 사유를 이끌어내는 영화입니다. 전쟁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젠 전장 밖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25시』는 그런 시선을 우리에게 선물해 줍니다. 지금, 이 영화와 마주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