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렌스 맬릭 감독의 2011년 작품 『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는 당시에도 화제였지만, 지금 다시 보아도 여전히 유효한 감정과 철학을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예술성과 상업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화 그 이상의 영화’로 평가받았습니다.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단순한 감상이 아닌 사유와 명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왜 이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형식, 철학, 미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겠습니다.
1. 할리우드의 공식과 결별한 테렌스 맬릭의 실험 정신
테렌스 맬릭은 이미 『씬 레드 라인』(1998), 『뉴 월드』(2005) 등을 통해 서사 중심 할리우드 영화 문법을 해체하는 감독으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도 그는 전통적 기-승-전-결 구조를 거부하고, 대신 단편적인 이미지와 기억의 연쇄를 통해 삶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주인공 잭(션 펜)의 기억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특정 사건이나 극적인 갈등보다, 삶을 구성하는 감정, 시간, 순간, 기억을 조합하여 내러티브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단지 한 인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개인적 체험의 장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형식적 도전은 상업영화계에서는 매우 위험한 시도입니다. 대중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한 것은, 단지 실험적인 연출 때문만이 아니라, 그 실험이 삶과 존재에 대한 보편적 질문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영화의 핵심적 장면 중 하나인 ‘우주의 탄생 시퀀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단편 영화처럼 작동합니다. 이 장면은 약 20분간 대사가 거의 없고, 천체, 세포, 자연의 이미지들이 몽타주 형식으로 이어지며, 삶의 기원과 인간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맬릭 감독이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영상 시각화의 탐구자임을 증명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아카데미가 점점 더 형식보다 메시지와 표현력에 집중하게 되는 변화의 흐름과 맞물리며 수상의 가능성을 높였고, 실제로 촬영상 후보 지명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2. 존재와 신을 묻는 철학적 메시지: 영화인가 기도문인가
『트리 오브 라이프』는 단순한 영화 그 이상입니다. 이 작품은 철학, 종교, 인간학, 심리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청각적 명상입니다. 영화는 초반 욥기의 문구로 시작되며, 인간의 고통과 신의 의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Where were you when I laid the foundation of the earth?”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이 인용문은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은 인생에서 고통을 겪지만, 그 고통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잭의 어린 시절, 특히 형제의 죽음과 아버지와의 갈등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왜 형은 죽었는가?’, ‘왜 나에게는 사랑과 억압이 동시에 주어졌는가?’ 이 질문들은 단지 개인의 고통을 넘어 인간 존재 전반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맬릭은 이 질문을 관객에게 강요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 속에서 그 답을 찾아가길 제안합니다. 나무, 빛, 물결, 하늘, 어머니의 미소, 아버지의 분노, 형제의 장난.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이루며 감정적 묵상의 통로가 됩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감상자가 아니라, 묵상자이자 질문자가 됩니다.
이는 기독교 신학적 구성뿐만 아니라, 동양 철학(특히 도가사상)적 접근과도 닿아 있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많지만,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과 이미지로 대신하는 영화는 매우 드뭅니다.
이 점이 아카데미의 평론가들, 특히 예술성과 사유 깊이를 중시하는 부문에서 높게 평가된 이유입니다.
3. 영상언어의 극한까지 밀어붙인 촬영미학
『트리 오브 라이프』의 촬영을 맡은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이 작품을 통해 **영상이 서사를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했습니다. 루베즈키는 이후 ‘그래비티’, ‘버드맨’, ‘레버넌트’에서 3년 연속 아카데미 촬영상 수상을 하게 되는데, 그 시작이 바로 이 영화였습니다.
그는 자연광과 핸드헬드, 장시간 노출, 360도 회전 촬영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빛’과 ‘감정’의 연결을 화면에 담아냅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아이의 손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 들판을 달리는 아이들, 거꾸로 된 나무의 실루엣. 이 모든 장면은 줄거리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합니다.
특히 가족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의 시선처럼 낮고 유연하게 움직이며, 관객이 마치 그 집안의 한 구성원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연출은 단지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감정적 몰입을 최대화하는 도구로 작동합니다.
그 결과, 관객은 영화가 끝났을 때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아도, 느꼈던 감정은 명확하게 남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감정 중심의 영상언어는 아카데미 촬영상 노미네이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영상 그 자체가 이야기하는 방식을 확립시켰습니다.
결론: 트리 오브 라이프가 남긴 유산과 지금 다시 봐야 할 이유
『트리 오브 라이프』는 2011년에도 대담한 영화였지만, 2025년인 지금 다시 보았을 때 훨씬 더 놀라운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지루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오늘날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 삶과 죽음, 존재에 대한 질문을 시각적으로 다룬 유일무이한 영화
- 내러티브를 거부하면서도 감정을 전달한 촬영과 편집의 혁신
- 종교적 주제를 보편적 언어로 전달한 영상 시
- 시대를 앞선 테렌스 맬릭의 연출 미학
아카데미는 이 영화를 수상까지 이끌진 않았지만, 후보 지명 자체로 그 가능성과 예술성을 공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보면 놀라울 만큼 선구적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면,
‘트리 오브 라이프’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 영화는 말없이, 그러나 깊이 있게 당신에게 답을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