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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와 인간 존엄에 관심 있다면 (사울의 아들, 침묵, 내면)

by MovieEasy 2025. 11. 24.

사울의 아들 영화 포스터

 

2015년 개봉한 헝가리 영화 『사울의 아들(Son of Saul)』은 전 세계 평단과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은 작품으로, 제68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제88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포함해 수많은 영화제를 휩쓸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상영관 확보의 어려움과 낮은 대중성과 난해한 연출 방식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조용한 반응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 영화 중에서도 독보적인 형식미와 철학적 깊이를 가진 작품이다. 침묵과 내면, 윤리적 선택과 인간 존엄이라는 주제를 카메라의 시선과 사운드로 풀어낸 이 영화는, 단순히 비극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와 기억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사울의 아들: 전형을 깨는 홀로코스트 영화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생존자』 등은 제노사이드의 참상을 직시하며, 이미지와 서사를 통해 역사적 교훈을 전달해 왔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은 완전히 다른 접근을 한다. 이 영화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지 않고, 감정적 동요를 유도하지 않으며, 관객을 수용소 내부로 ‘던져 넣는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 사울의 얼굴을 중심으로 한 클로즈 숏과 좁은 프레임으로 이야기를 밀도 있게 끌고 간다. 카메라는 그의 어깨 위에 고정되어 움직이며, 시야 밖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장면들은 관객의 청각과 상상력에 맡긴다.

사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존더코만도로 일하는 유대인이다. 그의 임무는 동족의 시신을 정리하고 소각하는 일이다. 어느 날 그는 가스실에서 살아나 잠시 숨을 쉬었던 소년의 시신을 발견하고,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여긴다. 이후 그는 소년에게 유대교식 장례를 치르기 위해 랍비를 찾고, 동료들의 탈출 계획과 상관없이 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불가능한 여정은 ‘인간 존엄’이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죽음을 마주한 자가 죽은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존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라슬로 네메시 감독은 극단적으로 제한된 시점과 ‘비가시성’을 통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제노사이드를 다룬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고통을 재현하거나 감정을 짜내는 것이 아닌, 오히려 차단하고, 침묵하고, 거리 두기를 통해 깊은 몰입을 유도하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시청자가 아니라 체험자, 외부 관찰자가 아닌 내부의 일부가 된다.

침묵과 사운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연출

『사울의 아들』은 말보다 사운드로 서사를 전개한다. 등장인물들은 말수가 적고, 대사보다 행동과 시선, 그리고 숨소리로 감정을 표현한다. 사울은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시종일관 수용소를 오간다. 영화는 그의 내면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동기가 무엇인지, 그 소년이 실제 아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영화의 음향은 사실상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관객은 가스실 내부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 벽 너머 총성, 구령 소리, 기계의 진동을 듣는다. 이러한 소리는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보다 훨씬 강한 공포와 불안을 자극한다. 시각이 차단된 만큼, 청각은 극대화되고, 관객은 본능적으로 상상하고 긴장하게 된다. 이는 폭력적 이미지를 반복 소비하는 기존의 전쟁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중요한 미학적 선택이다.

또한 침묵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사울은 말을 아끼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생존의 조건처럼 보인다. 수용소 내에서 감정은 사치이며, 말은 위험이다. 그러나 그 침묵은 인간으로서 감정을 잃은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감정이 응축되어 터지지 못한 상태를 반영한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큰 비명이 된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대한 ‘거리’를 확보하게 만든다. 관객은 사울의 감정에 이입되기보다는, 그를 바라보며 스스로의 윤리적 감각과 인간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물음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당신에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 존엄과 내면: 사울이라는 인물의 철학적 여정

『사울의 아들』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인간 존엄’이다. 사울은 모두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죽은 이를 위한 최소한의 예를 지키고자 한다. 그가 고집스럽게 아이의 장례를 준비하는 이유는 생존보다 더 큰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그 가치가 종교적 신념이든, 인간적인 죄책감이든, 혹은 실존적 저항이든 간에, 그것은 이 영화를 존재의 질문으로 확장시키는 핵심 동력이다.

사울의 행동은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가 그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며 아이의 장례를 치르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료들이 조직한 탈출 계획조차도 그는 외면하고, 오직 자신의 ‘사명’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이 사명은 단지 한 명의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한 윤리적 발언이다. 죽음마저도 기억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신념, 그것이 사울의 모든 행동의 근거다.

이런 그의 여정은 한 인간의 내면적 성숙과 윤리적 진화를 보여준다. 그는 점점 더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아이의 장례를 통해 찾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충돌이 발생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울은 미소를 짓는다.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것은 성취의 미소가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자 확인이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책임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사울은 시체가 된 아이의 얼굴 앞에서, 죽은 자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행동한다. 그것은 법과 규범을 넘어서, 인간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요구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윤리를 시각적이기보다는 감각적, 실존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결론: 사울의 아들, 기억되어야 할 질문

『사울의 아들』은 단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묘사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도 어떻게 존엄을 지킬 수 있는지를 묻는 철학적 텍스트다. 이 영화는 극단적 고통 앞에서조차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에 다가간다. 침묵, 내면,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들며, 관습적인 감상법을 거부하고 새로운 윤리적 감수성을 요구한다.

한국에서 이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쉽고 편안하게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이 반드시 쉬워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영화는 불편해야 하고, 어떤 이야기는 침묵 속에서 더 많은 말을 건넨다. 『사울의 아들』은 바로 그런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묻는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란 어디까지 가능한가? 침묵은 어떤 윤리를 가질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사울의 여정은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시험하는 하나의 윤리적 기준점이 된다. 그 의미에서 『사울의 아들』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작품이며, 인간 존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는 예술이다.